헤르메스는 태어난 날 소를 훔치고 어떻게 아폴론과 친구가 되었을까?
태어난 날 아폴론의 소를 훔친 헤르메스는 왜 벌 대신 우정을 얻었을까요? 뒤집힌 발자국과 능청스러운 변명, 리라 한 대가 바꾼 신들의 관계를 따라갑니다.

소 떼가 사라졌습니다. 흔적을 쫓아간 아폴론 앞에는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울기는커녕, 갓 태어난 자신이 어떻게 소를 훔치겠느냐며 제법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어젯밤 소를 몰고 달아난 바로 그 아기, 헤르메스입니다.
《호메로스 찬가》 제4편은 새벽에 태어나 낮에 리라를 연주하고 저녁에 소를 훔친 신의 첫날을 노래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도둑질은 곧 신들의 재판으로 번지지만, 끝에 남는 것은 형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뜻밖의 우정입니다.
요람보다 먼저 궁금했던 바깥세상
헤르메스는 제우스와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요람에 얌전히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동굴 밖에서 만난 거북의 등딱지로 현악기 리라를 만들고, 줄을 튕기며 자기 부모에 관한 노래까지 부릅니다. 말도 음악도 누구에게 배울 틈 없이 시작한 셈입니다.
이 아기에게는 갖고 싶은 자리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도둑질을 나무라자 그는 동굴에만 남아 살고 싶지 않으며, 다른 신들처럼 제물과 존경을 받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장난꾸러기의 소동 뒤에 아직 자기 몫을 얻지 못한 신의 야심이 놓여 있습니다.
그가 노린 상대는 이미 위엄과 권한을 가진 아폴론입니다. 누구도 모르게 작은 물건 하나를 슬쩍하는 대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소 떼를 건드립니다. 독자는 헤르메스가 무엇을 훔치는지뿐 아니라 누구에게 자신을 알리는지도 보게 됩니다.
발자국까지 거짓말하게 만들다
찬가에서 헤르메스는 소 쉰 마리를 떼어 몰고 갑니다. 추적자를 헷갈리게 하려고 소를 뒤로 걷게 하여 발자국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도록 하고, 자기 발에는 나뭇가지로 엮은 신을 댑니다. 소의 흔적도, 도둑의 흔적도 곧이곧대로 읽기 어렵습니다.
밤의 일을 마친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와 포대기를 두르고 눕습니다. 범행을 모르는 독자라면 무고한 아기로 볼 법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엇을 했는지 이미 보았습니다. 작은 몸과 대담한 행동 사이의 간격이 웃음을 만듭니다.
이 대목에는 판본 차이가 있습니다. 아폴로도로스 전승의 《도서관》은 소의 발에 신을 씌웠다고 설명하고, 리라를 만드는 일도 도둑질 뒤에 배치합니다. 여기서는 찬가의 순서를 따릅니다. 두 전승의 묘책을 모두 합쳐 헤르메스가 한꺼번에 실행했다고 쓰면 각 이야기의 구성이 흐려집니다.
제우스 앞에서도 끝나지 않는 변명
아폴론이 들이닥치자 헤르메스는 자기 나이와 가냘픈 발을 내세웁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우유와 잠이지 소 떼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범행을 부인하는 말솜씨 자체가 보통 아기가 아니라는 증거처럼 들린다는 점이 우습습니다.
다툼은 두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에게까지 갑니다. 아폴론은 이상한 발자국과 사라진 소를 설명하고, 헤르메스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처지를 강조합니다. 제우스는 능청스러운 부인을 듣고 웃지만, 그렇다고 소의 행방을 묻지 않은 채 돌려보내지는 않습니다. 그는 두 신에게 함께 가서 소를 찾도록 명합니다.
웃음과 무죄 판정은 다릅니다. 헤르메스의 말은 장면을 지배하지만 사건을 끝내지는 못합니다. 결국 숨겨 둔 소를 보여 주어야 하고, 아폴론의 화도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바로 이때 말싸움에서 음악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소 쉰 마리보다 탐나는 소리
헤르메스가 리라를 타며 노래하자 아폴론의 관심이 움직입니다. 그는 처음 듣는 악기의 소리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음악을 소 쉰 마리만큼 값진 것으로 여깁니다. 도둑에게서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던 신이 이제 도둑의 발명품을 갖고 싶어 합니다.
헤르메스는 리라를 건네고, 아폴론은 그에게 가축을 돌보는 역할을 맡깁니다. 하나는 새로운 소리를 얻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몫의 일을 얻습니다.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변명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재능이 관계를 바꾼 셈입니다.
오르페우스의 리라도 닫힌 마음과 경계를 움직이는 악기입니다. 다만 여기서 음악은 저승을 여는 비장한 호소가 아니라, 크게 다툰 두 신이 서로에게 다가갈 계기가 됩니다. 리라가 누구의 손으로 넘어가는지를 보면 화해의 과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친구가 되어도 약속은 필요하다
화해 뒤에도 아폴론은 한 가지가 걱정됩니다. 이렇게 솜씨 좋은 도둑이라면 방금 받은 리라까지 다시 훔쳐 가지 않을까요? 그는 헤르메스에게 자기 소유물을 훔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요구합니다. 헤르메스가 맹세하고 아폴론도 우정을 약속하면서 관계가 자리 잡습니다.
이 결말을 도둑질만 잘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교훈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찬가는 새 신의 재치와 발명, 교환 능력을 보여 주면서 그가 다른 신들과 함께 살아갈 조건도 마련합니다. 재능을 인정하는 일과 다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약속하는 일이 나란히 있습니다.
로키의 장난에서도 재주는 신들의 질서를 흔들고 때로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헤르메스의 첫 소동이 유쾌하게 끝나는 이유는 재주가 다툼을 키우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람에서 빠져나온 아기는 소 떼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받아 줄 친구까지 얻습니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 호메로스 찬가 제4편: 헤르메스에게 (새 창)고대 그리스 찬가 전승 · H. G. 에블린화이트 번역 · 1~18행, 68~153행, 260~396행, 414~532행
- 도서관 제3권 (새 창)아폴로도로스 전승 · J. G. 프레이저 번역 · 3.10.2: 헤르메스의 탄생, 소 도둑질과 리라의 교환
자료의 성격과 전승의 차이는 본문에서 구분해 설명합니다.
ONE THING TO REMEMBER
한 줄 정리
헤르메스는 소를 훔쳐 아폴론의 주의를 끌었지만, 두 신을 친구로 만든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음악과 서로 주고받은 약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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