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은 왜 한 번의 전투가 아니었을까?
청산리 전투 106주년을 맞아 1920년 10월 21~26일의 여러 교전을 살펴봅니다.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 산악 지형과 이동, 기록의 한계를 통해 하나의 이름에 담긴 독립전쟁을 읽습니다.

2026년 10월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지 106년이 되는 달입니다. 그런데 기념일을 달력의 하루에 표시하려 하면 질문이 생깁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어졌다는 청산리 대첩은, 정확히 어디에서 누가 벌인 전투였을까요?
하나의 지명이 여러 전투의 이름이 되다
청산리 대첩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하면, 한 지휘관이 한 장소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사건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백운평에서 시작해 완루구·천수평·어랑촌·고동하 등 여러 장소에서 이어진 교전을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우리역사넷은 첫 교전지인 백운평이 청산리에 속했기 때문에 그 지명이 뒤이은 전투들까지 대표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차이는 사건의 크기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날짜가 여럿이라는 것은 같은 싸움이 오래 계속되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부대가 자리를 옮기고, 다른 지형에서 적을 만나고, 새로운 조건에 대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투 이름을 외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소와 순서를 함께 보면, 독립군이 무엇을 해냈는지 구체적으로 물을 수 있습니다.
김좌진의 부대와 홍범도의 연합부대
청산리에서는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흔히 북로군정서라 부르는 부대와 홍범도가 이끈 연합부대의 활동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에 여러 독립군 조직이 합류했고, 이들은 각자의 조직과 활동 기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두를 처음부터 하나의 지휘 체계 아래 있던 군대로 그리면 당시의 협력 방식이 흐려집니다.
우리역사넷의 전투 준비 해설에는 군사훈련과 간부 양성, 지휘관들의 작전 협의가 등장합니다. 총을 들겠다는 뜻만으로 곧바로 부대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조직하고 훈련하며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는 시간이 싸움에 앞서 있었습니다.
이는 3·1운동이 여러 지역으로 퍼진 과정을 읽을 때도 중요한 관점입니다. 참여 방식은 달랐지만, 유명한 하루의 장면 뒤에 조직과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살피면 독립운동을 몇 사람의 결단만으로 설명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산속에서 싸운다는 것은 계속 이동한다는 뜻
일본군은 독립군을 포위하고 이동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골짜기를 지나고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가는 전투의 일부였습니다. 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약한 부대가 저절로 유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을 파악하고 움직임을 유지할 수 있어야 지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한 장소의 승리만으로 다음 교전까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병력이 지치거나 이동로가 막히면 앞서 얻은 이점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청산리를 읽을 때에는 승리한 순간과 함께, 그 전후에 부대가 어디로 움직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투 사이의 빈 시간처럼 보이는 이동이 실은 다음 싸움의 조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이 지형을 판단의 문제로 다룬 이유도 여기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고전의 원칙을 당시 지휘관들이 그대로 적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연결하는 것은 이해를 돕는 질문이지, 확인되지 않은 작전 명령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전과의 숫자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투를 설명하는 글에서는 병력과 사상자 수가 눈에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어떤 부대까지 포함했는지, 며칠 동안의 교전을 합산했는지에 따라 숫자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역사넷도 독립군의 병력과 무기 보유 상황을 정확히 확인하는 데 자료상 한계가 있다고 밝힙니다.
황민호의 연구 정리 역시 전투의 범위와 전과, 회고록의 평가를 검토 과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널리 알려진 숫자 하나를 모든 자료가 동의하는 최종 집계처럼 쓰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록의 작성 시점과 목적을 살피는 작업이 함께 필요합니다.
숫자의 불확실성을 인정한다고 전투 자체나 참여자들의 노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느 부분을 확인할 수 있고 어느 부분에 추가 연구가 필요한지 나누어야, 승리의 의미를 과장된 수치에 기대지 않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장면 뒤에 남는 사람들
부대를 유지하는 데에는 병사와 지휘관 외에도 군자금과 훈련을 뒷받침한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전투 준비 기록에 한인사회의 지원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전쟁을 전선의 순간만으로 읽으면 그 싸움을 가능하게 했던 생활의 영역이 보이지 않습니다.
청산리의 승리를 기념하는 일과, 그 승리만으로 독립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직이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 가려면 또 다른 이동과 재편, 지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한 번의 승리와 긴 독립운동의 지속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106년 뒤의 독자가 청산리를 다시 읽을 때 붙잡을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나 가장 큰 숫자만이 아닙니다. 여러 부대가 어떤 조건에서 싸웠고, 그 과정을 우리는 어떤 기록으로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따라가면 하나의 지명에 담긴 여러 날의 역사와 여러 사람의 일이 함께 드러납니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자료
- 신편 한국사 48권: 청산리대첩 — 백운평전투 (새 창)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Ⅲ-2-2)-(4)-가: 10월 21~26일 교전의 범위, 청산리 명칭, 일본군의 포위 계획
- 신편 한국사 48권: 독립군의 전투준비 (새 창)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Ⅲ-2-2)-(3): 대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 훈련·군자금, 병력 파악의 자료상 한계
- 청산리전투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과제 (새 창)황민호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5호(2020) · KCI 공개 초록: 전투 범위·전과 연구와 회고록 평가의 쟁점; 논문 전체를 대조한 것은 아님
자료의 성격과 전승의 차이는 본문에서 구분해 설명합니다.
ONE THING TO REMEMBER
한 줄 정리
청산리 대첩은 여러 부대가 여러 장소에서 벌인 전투를 아우르는 이름이며, 그 승리는 지휘관뿐 아니라 이동·훈련·지원의 조건까지 함께 볼 때 더 선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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